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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백제 계백장군의 일화 / 비장한 결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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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백제 계백장군의 일화 / 비장한 결의

드럼치는한동이 2009. 11. 27. 12:49
◐계백 장군의 비장한 결의◑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부인은 들으시오.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려.
내가 죽은 후 나당에 잡히게 되면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내 손에 흔쾌히 죽는 것이 나을 것이요."

(실제로 처자를 죽임)

또한,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들으라, 병사들이어.
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출처 : chungdong.or.kr/middroom/ sy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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