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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치는 프로그래머
[선덕여왕] '희대의 여걸' 미실, <삼국사기>엔 왜 안 나올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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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개월 동안 브라운관을 장악하며 주요 화제로 떠올랐던 신라 여인 미실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 언론보도에서 집중적으로 예고됐듯이, 미실은 10일에 방영될 <선덕여왕> 제50부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왕후가 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왕이 되려다가도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퇴장하는 뒷모습이 좀 안쓰러울 수도 있지만, 미실은 적어도 브라운관에서만큼은 왕후나 왕에 못지않은 최고의 인기를 한껏 누렸다. 지금까지 시청한 것은 <미실>이고 앞으로 시청할 것이 진정한 <선덕여왕>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 속 미실이 남긴 최대의 영향이라면, 신라 사회의 이미지와 함께 전통시대 여인의 이미지에 중대한 의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한 여인이 공공연하게 여러 남편들을 두는 상황이나 여성의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상황 등은 기존의 역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근거한 기존의 역사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한국사 여느 여걸과 달랐던 '미실'
드라마 속 미실이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위작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 역시 '여걸'이라는 한마디로는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인물이었다. 1933~1945년에 일본 궁내성에서 사무촉탁 신분으로 조선 관련 서적을 조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신라사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미실은 한국사에 나오는 여느 여걸들과는 확실히 다른 여인이었다.
서기 546~549년 사이에 태어나 610년대 중반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미실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꽤 화려했다. 그의 어머니는 초대 풍월주인 위화랑의 손녀이자 법흥왕의 후궁인 동시에 대원신통이라는 왕비족의 혈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세 풍월주이자 법흥왕의 외손자였다. 이렇게 미실은 화랑도 및 왕실과의 인연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또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분' 및 '미모'와 스스로 연마한 '색공'을 기초로 미실은 신라 최고위층 남자들을 자신의 품안에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화랑 사다함(제5세 풍월주), 진흥왕의 의부형제이자 자신의 정식 남편인 세종(제6세 풍월주), 화랑 설원(제7세 풍월주), 제24대 진흥왕, 동륜태자(진흥왕의 장남), 제25대 진지왕(진흥왕의 차남), 제26대 진평왕(진흥왕의 손자) 등이 모두 다 미실의 남자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진흥·진지·진평왕 3대를 모실 수 있는 '특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하기도 했다.
신분과 미모와 색공은 미실을 단순히 '플레이걸'로만 만든 게 아니었다. 수완까지 겸비한 그는 이런 자원들을 바탕으로 권력핵심부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화랑세기> 제11세 풍월주 하종 편 등에 따르면, 미실은 진흥왕이 자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진흥왕이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에도 반드시 미실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자연히 미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 자신의 품안에 들어온 최고위층 남자들을 바탕으로 그는 아예 신라 전체를 가슴속에 품으려 했다.
진흥왕 때에 공고히 다진 권력을 바탕으로 미실은 진지왕 및 진평왕 옹립을 주도했으며, 진평왕 집권기에는 막후 실세로서 신라의 국정을 수중에 장악했다.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 따르면, 미실은 한참 나이 어린 진평왕의 후궁 역할을 하면서 조정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다고 한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의 신라 국정의 배후에는 미실이 숨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부식이 미실을 다루지 않았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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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요부'이고 또 어찌 보면 '여걸'인 미실의 활약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참 대단한 여자야!"라는 공통적인 감탄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막힌 속을 뻥 뚫어줄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단한 여성이라는 감탄이 들면서도,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면 왜 <삼국사기> 같은 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걸까'하고 말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거의 50년 정도나 권력 핵심부에 있었던 인물이 <삼국사기>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런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삼국사기> 곳곳에서 <화랑세기>를 언급한 김부식이 미실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면,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8월 13일자 MBC <뉴스후> '일본 왕실도서관의 비밀'에 출연한 후지모토 유키오 일본 도야마대학 한국학 교수는 5만권 정도의 한국 고서들이 일본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처럼 <화랑세기>를 비롯한 한국 고서들이 왕실도서관을 포함한 일본 경내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 일본측이 원본 자료들을 내주지 않는 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확정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온 미실의 실존 여부에 대해 일단은 유보적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근거한 학계 논문들의 타당성에 관한 판단 역시 원본 <화랑세기>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일단 유보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미실이 실존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어느 경우든지 간에 어차피 김부식은 미실을 다루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미실이 실존인물인 경우에도 김부식은 그를 다루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김부식은 '지독한' 남존여비사상 소유자?
<삼국사기>는 본기·연표·잡지·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부분은 본기와 열전이다. 본기는 왕의 집권기에 벌어진 사건들을 연대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고, 열전은 기타 인물들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미실은 왕이 아니었으므로 본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본기의 사건 목록에서도 거명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을 주인공으로 한 본기에서는 특정 연도의 역사를 보통 한두 개의 사건으로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한두 개의 사건이 '올해의 뉴스'에 선정된 것이다. 또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았다"(진평왕본기 2년)나 "대내마 만세·혜문 등을 수나라에 파견했다"(진평왕본기 26년)는 기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본기에서는 특정 사건에서 공식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만 소개했다. 이렇기 때문에, 미실처럼 막후에서 비공식적으로 실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본기의 사건 목록에서도 거명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미실 같은 거물이 열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김유신·거칠부·사다함 등은 <삼국사기> 열전에도 나오는데, 미실은 왜 그렇지 않은 걸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2가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김부식이 '지독한' 남존여비사상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그의 사고방식은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에 잘 나타나 있다. 선덕여왕 시대의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정리한 다음에 그는 "사관(史官)은 논한다"라면서 선덕여왕에 대한 반감을 아주 노골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당나라 측천무후 등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사내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어찌 할머니들이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도록 용인하겠는가?"라며 "신라가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힌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니,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한 뒤에, 암탉이 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국의 군주를 상대로 한 이 정도의 발언은 거의 '막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국 역사 통틀어 '열전'에 이름 남긴 건 지은과 설씨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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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의 '지독한' 남존여비사상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라면, 원본 <화랑세기>를 통해 미실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었더라도 어떻게든 미실을 배제하려 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처럼 여러 남자들을 두고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한 여인이 김부식 같은 유교적 지식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선덕여왕처럼 공식적인 지위를 차지했다면 모르겠지만 미실은 후궁으로서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미실에 관한 기록을 생략한다 해도 편파 시비가 일어날 소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 기록을 비판해야 할 지식인들마저도 김부식과 별반 다름없는 유교 신봉자들이었으니, 미실 같은 여인을 뺀다 해도 사회적 파장이 별로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유교이념에 부합하는 여인들만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주인공들은 삼국을 통틀어 가장 '쟁쟁했던' 수십 명의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 여성은 '효녀 지은'과 '설씨녀'다. 천년이나 되는 삼국의 역사를 통틀어 이 여인들만 <삼국사기> 열전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효녀 지은과 설씨녀의 열전을 읽어보면, 김부식이 그들의 열전을 만든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효녀 지은은 결혼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셨고, 설씨녀는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를 '6년간이나' 기다려주었다. 그들은 어버이와 지아비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강조하는 유교윤리에 부합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는 김부식이 자기 시대의 유교적 잣대를 갖고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임의로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효녀 지은과 설씨녀는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업적'이 과연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을까?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를 6년간이나 기다려준 여인을 '삼국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인들'에 포함시킬 정도였다면, 김부식을 비롯한 유교적 지식인들의 여성관(觀)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인물들의 머릿속에서 미실 같은 여인은 '역사에 기록할 가치가 없는 악녀'라고밖에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후궁 주제에' 권력을 농단했을 뿐만 아니라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와 잠자리를 같이한 미실이라는 존재는, 유교적 지식인들의 눈에는 '아예 흔적 자체를 지워버려야 할 요녀'라고밖에 비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여인들
위와 같이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지독한 남존여비 사상을 갖고 있었고 또 유교적 취향에 맞는 여성들만 부각시킨 점을 볼 때, 우리는 김부식이 미실을 다루지 않은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미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될 수 없었다고 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인 경우에는 김부식이 미실을 몰랐을 것이므로 <삼국사기>에 미실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인 경우에는 김부식이 미실을 알았더라도 위와 같은 '신념상의 이유 및 삼국사기 구성상의 이유' 때문에 미실을 <삼국사기>에 기록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우리는 미실 외에도 수많은 여걸들이 김부식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면서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년이나 되는 삼국의 역사에서 열전에 기록될 만한 여인들이 '고작' 효녀 지은과 설씨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는 유교적 잣대에 부합하지 않는 '행실 나쁜' 여인들이 고려시대 이후 역사기록에서 삭제되는 불이익 즉 '의문사'를 당하는 일이 상당히 많았을 것임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피해자'는 결코 미실 한 명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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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nate.com/view/20091109n05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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